설국열차, 피를 마시는 혁명

(이 글에는 설국열차와 그 외 몇몇 작품의 스포가 포함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특정한 서브컬쳐를 자주 접하는 덕...사람들이 자주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게 되는 특정한 구조의 주제의식이나 내러티브가 있습니다. 그것은 메인스트림에서는 손발이 오글거리고 안 팔릴 것 같다는 이유로 자주 외면되기 때문인지, 대형영화관에 걸리는 영화에서 그러한 구조를 접하게 되면 그들은 익숙함과 원인모를 불안감을 함께 느끼게 됩니다. 설국열차는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었던 오랜만의 영화였기에 그 시점에서 한 해석을 써보려 합니다.


영화는 열차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혁명에 대해서 다루고 있습니다. 첫번째 혁명은 검은색 재료불명의 인간용 사료에 숨겨져 전해지는 빨간 쪽지에 의지한, 커티스의/꼬리칸의 혁명입니다. 이 혁명은 윗칸의 압제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하여, 빛이 사라지는 터널에서 위기를 맞지만 프로메테우스처럼 성화를 들고 이어지는 사람들의 행렬에 의해, 불의 힘을 얻어 물을 되찾는 성과를 거두어냅니다. 
하지만 혁명군의 정신적 지주인 길리엄의 태도는 뜨뜻미지근합니다. 혁명군도 주인공도 관객도 여기서 멈추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때 그는 멈추자고 하지만, 주인공이 거절하자 딱히 더 만류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영화 초반부터 계속 커티스에게 지워졌던, 지도자(왕)은 커티스가 되리라는 현실을 확인시켜줍니다. 

그 후 혁명군의 행보는 더 이상합니다. 총리를 인질로 삼았다는 사실 하나만 믿고 너무도 평화롭게 앞 칸으로 전진해 나갑니다. 물 - 식량 - 스시(수렵) - 농장(농경) - (시스템의 안정을 위한)교육 - (잉여자원과 시스템의 안정에 이어지는)향락 - 권력으로 이어져 있는 열차의 순서가 인류의 역사와 사회의 발전순서를 닮아 있긴 하지만, 그러한 상징성으로 보더라도 분명 사람들의 분노와 커티스의 뚜렷한 목적의식으로 시작했던 혁명군은 초점을 잃은 듯 보입니다. 지금 거기서 초밥을 먹고 있을 때가 아닐 텐데요? 

문 열어달라고 귀한 마약 줘가며 고용한 한국 부녀는 여정 내내 깐죽대기만 하고 마약만 칼같이 챙겨갑니다. 의지하던 사람들을 허무하게 죽여가며 마침내 도달한 마지막 문 앞에서 한국인이 또 깐죽댑니다. x같은 문 여는게 그렇게 중요하냐? 폭발한 커티스는 한국인과 한 판 붙지만 판정패하고 드디어 남자끼리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캡틴아메리카...가 아니라 꼬리칸에서 17년을 구른 전투력 만렙 미국캐릭이 독방감옥에 17년 갇혀있던 한국 아저씨한테 졌어요 세상에. 
그리고 아직 첫번째 혁명의 답이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두번째 혁명의 방향이 제시됩니다. 위가 아닌 밖으로. 너무 오래되서 벽처럼 보이게 된 문을 부수고 밖으로.

송강호의 혁명은 처음부터 앞으로/상위계층으로 문을 계속 열어젖히는 데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혁명을 위한 거래수단으로서만 일을 해왔고, 마지막 순간 다른 비전을 제시합니다. 닫힌 시스템의 정점으로 가 봤자 달라질 건 없으니 시스템을 깨트리고 밖으로 나가자는 거죠. 애초에 저 부녀가 영화 내내 너무나도 이질적이고 물에 뜬 기름 같은 존재였던 이유는 정말로 목표, 본질이 전혀 다른 존재들이기 때문일까요. 그러나 꼬리칸의 상징성을 짊어진 채 그 예전의 삶이 기억조차 나지 않게 된 커티스는 거절합니다. 

그 순간 시스템의 정점에서 내려온 사자에게 제 2의 혁명가는 총알을 선물받고, 제 1의 혁명가는 초대를 받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고 저항할 수도 없는 커티스는 얌전히 초대를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그가 알게 되는 진실은 그가 윌포트, 새로운 세계의 신께서 예비하신 장기말에 불과했다는 것이죠. 지금의 그를 만든 사람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길리엄은 내통자였고, 그가 받던 빨간 쪽지는 윌포트가 직접 써서 보내던 하사품입니다. 


여기부터 다른 작품 얘기가 나옵니다만, 소설 피를 마시는 새에는 엘시 에더리라는 불세출의 장수가 있습니다. 그는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나 무력의 정점에 서 있다는 이유로 피할 수 없는 왕의 길로 달려가다가, 자신이 어떤 이종족에 의해 만들어지고 관리받을 신세계의 신이 준비한 장기말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절망하게 됩니다. 낯익은 구도네요. 

빨간 쪽지는 거짓 현실에 순응하는 선택인 매트릭스의 빨간 약이거나, 열차라는 거대한 실린더에 동력을 부여하는 붉은 불꽃이었습니다. 윌포드가 열차에 어떤 기여도 할 수 없고 열차운행의 원래 계획에도 없었던 꼬리칸 무임탑승자들을 일부나마 살려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선택이 내려지기까지 어떤 논의가 이루어지고 어떻게 그 양갱제조기마저 만들어지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만,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들의 '혁명'은 어떤 불꽃에 의해 촉발되어 위를 향하며, 본의아닌 인구조절과 긴장감의 조성과 새 지도층의 수혈이라는 부수효과를 달성합니다. 폭발에 의해 팽창하며 피스톤의 상승과 바퀴의 회전이라는 부수효과를 달성하는 엔진의 실린더처럼. 
열차는 그야말로 거대하고 성스러운 엔진이 된 것이죠. 그 동력은 영원히 충족될 수 없는 인간의 욕망과 질시와 권력욕이고. 

커티스는 무거운 침묵과 일그러진 표정으로 첫번째 혁명의 실패를 인정하며 순순히 새로운 위치에서 부속품이 되려는 것처럼 보이지만, 5살짜리 아이가 정말로 부품이 되어 있는 아동학대의 현장을 본 순간 정신이 돌아와 시스템을 공격하고 결과적으로 남궁 민수의 두번째 혁명을 돕게 됩니다. 이 부분이 서양인들이 아닌 동양인들에게 감정적으로 소구해야 하는 부분이었다면 아동학대가 아닌 다른 모티브를 사용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합니다. 

'남궁' 민수는 이제까지 흘려온 피에 또다른 피를 더해가며 끝끝내 세상을 찢고 다른 세상으로 나가는 두번째 혁명을 성공시킵니다. 알을 찢고 신에게로 날아간 새처럼, 또는 왕자님이 부여한 공주님 역할을 찢고 밖으로 나간 우테나와 안시처럼. 그 혁명의 수혜자는 황인종 어른과 백인종 어른에게 둘러싸인 흑인종 아이와 황인종 소녀입니다. 

추정상 인류의 마지막 생존자들인 듯한 이들은 열차가 온통 전복되어 불타는 지옥도 속에서 하얀 신세계로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눈밭 위에서 귀여워 보이지만 실은 마주치면 살아남기가 어렵기로 유명한 북극곰을 만나게 됩니다. 
사실 이 엔딩은 터널에서의 전투에 삽입된 새해 축하 장면과 함께 봉준호의 (찜찜한) 테이스트를 새삼 확인시켜 준 장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희망을 보여줄 목적이라면 식물도 있고, 펭귄이나 새 같은 위협적이지 않은 동물도 얼마든지 있는데 왜 하필 북극곰이죠? 인간은 끝끝내 시험을 이겨내고 시스템을 벗어나 자유의지를 되찾지만, 그게 그들의 생존과 행복과 번성을 보장해 주지는 않습니다. 그냥 몇 번이라도 좋을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삶을 다시 되찾은 것에 의의가 있을 뿐이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두 남녀가 서로의 목을 조르고 '기분 나빠'라고 말하며 끝나는 EOE처럼.



지나치게 많은 오마쥬를 담은 것 같기도 하고 시간이 짧았나 싶게 허술하기도 하고 러닝타임이 더 주어졌어도 이 이상의 이야기를 넣기 힘든 구조인 듯도 했습니다. 완벽한 복선회수나 충격적 반전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도 딱히 없고, 나름 개성적이지만 의외로 예상하기 쉬운 스토리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설국열차는 보는 동안은 편하게 볼 수 있을 정도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 이것저것 생각하고 뜯어볼 여지도 제법 남긴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총리 역의 틸다 스윈튼이 정말 빛나는 연기를 했다는 점도 새삼 말하게 되네요. 

by Frozenblue | 2013/08/05 01:40 | 보다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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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승네군 at 2013/08/05 10:13
다른데서 북극곰의 상징이 먹이사슬을 의미하는것 일것이다라는 의견을 봤는데요.
먹이사슬이 있다는건 (북극곰이 있다는건) 생태계가 존재한다는거고.. 희망적인 결말이다.. 라는거였는데, 그럴듯 하다고 생각했는데.. 이 글을 보니 그냥 열린결말인가 싶기도 하고요..

생태계는 복원되었지만, 먹이사슬의 최정점은 아니니 죽을수도 있고...
영화자체는,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뜬금없는것도 많았구나 싶긴한데.. 보면서는 꽤 재미있었거든요. 일반인 입장에 영화가 재미있으면 된거죠 뭐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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